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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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첫눈/이해인함박눈 내리는 오늘 눈길을 걸어 나의 첫사랑이신 당신께 첫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언 손 비비며 가끔은 미끄러지며 힘들어도 기쁘게 가겠습니다. 하늘만 보아도 배고프지 않은 당신의 눈사람으로 눈을 맞으며 가겠습니다. 추천인:박정곤(전통문화 연출가) "아직 맞아보지는 않았지만 하얀 첫눈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마음속에도 첫눈이 내린다.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나는 어느새 하얀 눈사람이 된다. 수많은 '첫눈'에 관한 시 중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첫눈'이 생각이 난다. 이 시를 읇조리면 영혼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언제나 마음 설레이게 하는 첫눈처럼....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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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첫눈처럼 내가 가겠다/이미나널 품기 전 알지 못했다 내 머문 세상 이토록 찬란한 것을 작은 숨결로 닿은 사람 겁 없이 나를 불러준 사랑 몹시도 좋았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평범한 모든 순간들이 캄캄한 영원 그 오랜 기다림 속으로 햇살처럼 너가 내렸다 널 놓기 전 알지 못했다 내 머문 세상 이토록 쓸쓸한 것을 고운 꽃이 피고 진 이곳 다시는 없을 너라는 계절 욕심이 생겼다 너와 함께 살고 늙어가 주름진 손을 맞잡고 내 삶은 따뜻했었다고 단 한 번 축복 그 짧은 마주침이 지나 빗물처럼 너는 울었다 한 번쯤은 행복하고 싶었던 바람 너까지 울게 만들었을까 모두 잊고 살아가라 내가 널 찾을 테니 니 숨결 다시 나를 부를 때 잊지 않겠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니가 준 모든 순간들을 언젠가 만날 우리 가장 행복할 그날 첫눈처럼 내가 가겠다 너에게 내가 가겠다 추천인:기찬숙(칼럼니스트) "가끔은 애절한 노래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첫눈을 기다리는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영화의 OST인데, 절절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막연하지만 마지막 절 ‘첫눈처럼 내가 가겠다/ 너에게 내가 가겠다’가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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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호박꽃/ 정연복첫눈에 보기에 생긴 모습 그대로 '포용'과 '관대함'이라는 꽃말을 가졌네 '사랑의 용기'라는 또 다른 꽃말도 있다네 후덕한 성품의 아줌마같이 느껴지는 너와 마주친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추천인:김바다(언론인) 호박꽃은 매혹적인 향기도 없고, 화려한 색상을 내지도 않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호박을 출산한다. 못난 자식에게도 포용하고 관대하게 바라봐 주는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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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다원 창극 '김지숙의 나타샤 – 가슴에 핀 사랑가'극단 '독무'가 24일 전주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에서 창극과 무용, 라이브 음악과 영상을 결합한 다원 창극 '김지숙의 나타샤 – 가슴에 핀 사랑가'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예술의 다원화 시대에 맞춰 각 예술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전통공연과 무용, 미디어를 결합한 융복합 장르이다. 전라북도가 후원하고 전북대학교가 주최하며 극단 독무와 하이브리드 문화예술연구소의 주관으로 진행되는 공연이다. 연출 및 대본은 최교익, 주인공 자야 역할을 맡은 김지숙 명창이 1인 창극 서사 방식으로 극을 이끈다. 이 작품 내용은 백석 시인과 기생 김영한 여사의 만남, 사랑, 이별을 그리고 있다. 첫눈에 반하게 되는 순간부터 이별의 순간까지, 영원히 행복할 것만 같던 3년 간의 동거생활 중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 백석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친다. 부모의 의지대로 다른 여인과 강제로 혼인하게 된 백석은 자야를 찾아와 만주로 도망갈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될 것을 염려한 기생 자야의 거절. 백석은 언젠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만주로 올 것을 확신하며 먼저 만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자야를 그리워하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지어본다. 그들의 사랑은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한편 김지숙 명창은 국립창극단 재직 당시 춘향, 심청, 숙영낭자 등 주역 배우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국악제전 춘향국악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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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71)<br>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내게 오래도록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첫눈이 대개 그렇듯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이 아니라 감질 맛나게 하늘에 빗금을 긋고 사라져 버리는 가녀린 눈발이었다. 그 눈발 속에 나는 서 있었다. 지금은 천진암 경내가 되어 어딘지도 모르게 변해 버린 곳, 그러나 과거에는 작은 다리를 건너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우측으로 낀 채 좌측의 얕은 둔덕을 돌아들면 외딴 민가와 그 옆에 작은 과수원이 있었다. 나는 그 과수원 잎 떨군 나목들 사이에서 눈을 맞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내리는 눈발보다도 더 하얀 바탕에 맑은 날 푸른 하늘보다도 더 짙은 푸른 색감의 소나무 그림이 들어간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을 만날 수 있었다. 아득히 먼 80년대 초의 일이다. 1994년 4월, 바다 건너로부터 고미술계가 자못 흥분되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조선 15세기에 만들어진 백자청화보상화당초문접시가 3백8만달러에 팔렸다는 이야기가 들려 온 것이다. 이는 우리 돈으로 약 24억6천만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당시로서는 전 세계 도자기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것이었다. 우리 고미술계로서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초유의 기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질과 형과 색감에서 이만한 도자기가 흔치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 초기 백자접시는 그 자체로 귀한 것이다. 거기에 조금의 일그러짐도 없는 둥근 순백의 바탕에 청화로 문양을 넣은 전접시는 알려져 있는 것 자체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백자청화보상화당초문접시는 이들을 대표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명품이다. 그러니 당시 세계 도자기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라고 하면 청화가 귀하던 시절이다. 조선은 물론이거니와 중국도 청화를 아랍에서 수입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청화는 중국이 아랍에서 구입해 온 것을 어렵게 다시 구해온 것이니 금보다도 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청화를 회회청(回回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랍 산 코발트블루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코발트블루라고 해서 아랍에서 흔하게 쓰였느냐 하면 그 것은 아니다. 아랍에서도 코발트블루는 신성시해서 알라를 모시는 모스크나 왕궁 정도에서나 사용하던 안료였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정문이나 하늘과 맛 닿는 돔 그리고 중요한 벽면 정도에나 사용했던 것이다. 청화에서 많이 보이는 당초문 또한 사실은 코발트블루와 함께 아랍에서 건너온 문양 중의 하나다. 그러니까 초기의 백자청화는 아랍의 문화와 깊은 관련 속에 만들어진 도자기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하면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은 왜 중요한 것일까. 도자기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백자청화보상화당초문접시의 보상화당초문은 도안화 되고 양식화 된 문양이다. 그런데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의 소나무는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이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도자기들이 대개 그렇듯이 초기에는 중국의 기형이나 문양을 따르다가 한국적인 것으로 변용 발전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청화에서는 도식화된 문양에서 회화적인 요소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에서도 이런 발전 양상을 접할 수가 있다. 백자청화보상화당초문접시와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을 비교해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장식적인 청화와 회화적인 요소가 농후한 두 점을 놓고 비교해 본다면 어느 것이 더 아름답고 가치가 있을까. 구지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성역화 사업으로 지금은 옛 모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천진암 경내에서 만난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은 내게 오래도록 아름다운 추억과 즐거움을 선물해 주고 있다. 아니 아직도 흥분과 전율을 느끼게 하고 있다면 과장일까. 나는 이처럼 순백의 바탕에 이처럼 고운 빛깔의 청화로 소나무를 그린 우리 도자기를 어디서고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처럼 눈부시게 흰 태토에 맑고 투명한 유약 그리고 섬세한 청화의 그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추측컨대 화원이 그렸음직한 소나무 밑에는 신선이라도 앉아 있지 않았을까.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은 굽에 고운 모래가 붙어있고 굽 안은 유약을 훑어내고 태토가 그대로 들어나 있다. 직각으로 꺽인 전에는 장식문이, 그리고 내저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청화로 그려져 있다. 이 소중하고도 귀한 백자청화송문전접시편을 보고 있노라면 80년대 초 첫눈이 내리던 천진암 경내에서 운명처럼 만났던 그 날의 그 인연과 감격이 아직도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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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8)<br> 청자철채상감시문매병편감사 감사 또 감사 이규진(편고재 주인) 실물을 볼 수 없는 도편을 만나면 고질병인지 가슴부터 울렁거린다. 청자철채상감시문매병편을 처음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처음 본 것은 핸드폰이었다. 메일로 보내 준 사진을 본 것인데 첫눈에 세상에 없는 유일무이한 도편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니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고 그 즉시 달려가 실물을 보았는데 내 예감이 맞는 것이었다. 청자철채에 상감으로 시문이 들어간 매병은 국내에서 아직까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터여서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다. 청자에서 철채는 철유와 혼동하기가 쉽지만 전혀 다른 기법이다. 철채는 산화철 안료를 그릇 표면 전체에 골고루 바른 후 그 위에 유약을 시유해 번조한 것이고 철유는 산화철 성분 자체의 유약을 그대로 시유한 것이다. 따라서 깨진 단면을 볼 것 같으면 철채는 철채와 유약의 두개 층이 보이지만 철유는 철유 한층만 보여 구분을 할 수 있다. 청자철채로 현재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철채퇴화삼엽문매병이 있다. 보물 제340호인 이 매병은 전면에 철화 안료를 바르고 몸체 양면에 삽엽문을 얇게 파낸 뒤 그 위에 백토를 발라 문양을 장식하고 있다. 따라서 검은 철채와 백토 삼엽문의 강렬한 대비가 어울려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이는 것이 특색이다. 청자철채 중 상감이 들어간 것으로는 호림박물관 소장의 청자철채상감운학문매병이 있다. 각이 진 반구형의 입술에다 목은 짧으며 어깨 부분은 급하게 부풀어 올랐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굽으로 이어진다. 표면 전체에 철채를 한 후 몸통에는 학과 구름을 상감으로 그려 넣고 있다. 굽은 안다리굽이며 접지면의 유약을 훑어낸 후 내화토 받침을 하고 있다. 이와 거의 비슷한 것이 지금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으로 넘어가 있는 아타카컬렉션에서도 한 점 보이고 있다. 그런데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을 떠올리다 보니 이곳에 기증된 이병창 컬렉션이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이 아닌가. 매병은 아니지만 청자철채상감시명병이 벼락처럼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시명병은 반구형의 입술에 어깨가 벌어졌다가 동체가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가는 원통형에 가까운 기형인데 동체 양면에 술과 관련된 시를 두 줄씩 백상감으로 넣고 있다. 굽은 안굽으로 바닥이 접지면보다 기형적으로 높이 위치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부 네 군데에 구멍이 나 있는데 끈으로 매달아 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비록 매병은 아니고 통형병이기는 하지만 청차철채에 백상감의 시문이 들어간 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이 것이 유일하다. 청자철채상감시문매병편 또한 시문이 들어간 청자철채매병으로는 이 것이 또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청자철채상감시문매병편은 현재 두 조각으로 남아 있다. 한 점은 아무런 문양이 없지만 안다리굽 쪽이어서 이를 살펴보면 도편이 매병편임을 알 수 있다. 또 한 점은 매병의 몸체답게 배가 부른 둥그스럼한 형태인데 여기에 백상감으로 시문을 그려 넣고 있다. 남아 있는 글자를 보면 모두 다섯 글자인데 강어약(江魚躍)과 노마(路馬)다. 강에는 물고기가 뛰고 길에는 말이라는 뜻인데 없어진 부분이 많아 전체적인 시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 알아보아야 할 연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시문 옆에는 늘어진 버들가지 같은 것도 한 줄기 보인다. 청차철채상감시문매병편은 현재 표구가 되어 액자 속에 들어 있다. 이 말은 원 소장자가 이 도편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도편이라고 해서 값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오래간 만에 가슴 울렁거리는 희열을 맛보았는데 어찌 주머니 사정만을 고려하고 있을 수 있었으랴. 비록 출혈은 있었지만 소중한 인연에 감사 감사 또 감사하기만 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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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강강술래종합예술이자 민속놀이인 강강술래는 주로 음력 8월의 한가위 때 우리나라 남서부 지방 일대에서 연행되어 온 민속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교란하기 위해 강강술래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군이 주둔지 인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모닥불 주위를 돌면서 큰소리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게 했고, 이로 인해 왜군이 불빛 아래 수없이 가물거리는 그림자들을 보고 장군의 병력을 과대평가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진도에서 불려온 강강술래 가사 중 하나다. 저 건너 큰 산 밑에, 강강술래 / 동백 따는 저 큰 아가, 강강술래 / 앞돌라라 인물 보자, 강강술래 / 뒷돌라라 태도 보자, 강강술래 / 인물태도는 좋다마는, 강강술래 / 눈주자니 너 모르고, 강강술래 / 손치자니 넘이 알고, 강강술래 / 우리 둘이 일허다가, 강강술래 / 해가 지면 어쩔거나 강강술래.’ 들에서 봄나물 따다가 첫눈에 부딪친 맘에 드는 상대를 발견했는데, 행여 옆에 있는 친구들이 눈치 챌까봐 설레는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심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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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마을에 “아리랑꽃을 피웠습니다”13일 토요일 오후 3시, 초겨울의 청명한 날씨에 하숙마을 한옥에서 아리랑꽃이 피었다. 어린이 6명과 회원 30여명, 그리고 장고춤 여성 3인의 단촐한 출연이었지만 무대는 화려했다. 첫 무대는 남은혜 명창, ‘숙세가’와 ‘은개골아리랑’으로 꾸몄다. 환호와 큰 박수가 있었다. 지난 달 29~30일 러시아 카잔지역 초중고 교사 대상 ‘마스터클라스 세미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 민요의 맛을 알린 공로에 대한 감사의 박수였다. 이어진 화려하고 신선한 무대는 어린이 6명이 꾸몄다. 본조아리랑과 늴리리야를 불렀다. 서민호 박고은 오하연 박세아 장다은 김나림 지유리 강소율 어린이들이 꾸민 무대로 이름과 모습에서 향기를 발했다. 관객들은 첫눈을 맞이하듯 반겨주었다. ‘국악의 미래’ 출현을 축하해 준 것이다. 윤명숙 허경자 김옥빈 최규필이 꾸민 여성 ‘장고춤’은 이색적인 무대였다. 남성적인 ‘북춤’과 대비되는 여성 춤의 고아한 맛을 잘 전달해 주었다. 30여명의 회원들의 네 번에 걸친 무대는 흥겨운 경기민요로 꾸몄다. 군밤타령, 방아타령, 태평가, 청춘가, 양산도, 신고산타령, 뱃노래, 경복궁타령으로 흥을 돋워 주었다. 남성회원들은 지게 작대기 장단으로, 여성회원들은 채질과 물래잦기로 옛 정취를 자아내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 무대는 전 출연자 대합창 본조아리랑으로 맺었다. 아쉬운듯한 90분 공연이었다. 특히 어린이들의 출연은 여운을 주는 무대였다. 무대도, 출연자도 한옥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어우러진 무대, ‘아리랑으로 꽃을 피운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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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 다 모았다 '오페라로 사랑배우기' 시즌2[광주=뉴시스] 사랑의 감성으로 가득한 오페라 주요 장면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갈라 콘서트가 광주에서 펼쳐진다.빛소리오페라단은 4일 오후 3시 광주아트홀에서 '오페라로 사랑배우기 시즌2'를 공연한다.춘향전에서 첫눈에 반해버린 설레임의 마음을 담은 '사랑가'(작곡 현제명)와 '그리워 그리워'를 테너 박성원과 소프라노 장희정이 노래한다.또 희대의 난봉꾼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돈 조반니 중 '그대의 손을 주오'를 바리톤 권용만과 소프라노 박미애가 들려준다.오페라 '카르멘'과 '코지판투테', '춘희'에 등장하는 '투우사의 노래'와 '모든 행복과 기쁨', '축배의 노래'도 관객을 만난다.이번 공연에서는 오페라 속 아리아들을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각의 소품과 의상이 소개되고 해설도 한다. 빛소리오페라단은 그동안 '마술피리' '버섯피자', 창작오페라 '꽃 지어 꽃피고' '학동엄마' 등을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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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잡상 - 모기, 복숭아 그리고 국악협회 -갑작스레 규모를 줄여 이사하다 보니 모든 공간을 책으로 채우게 되었다. 에어컨 설치도 선풍기 놓을 자리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빌라 맨 위층 끝이라 모든 문을 열고 살아도 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모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오늘 밤도 겨우 잠들려는 즈음에 웨~이~잉 하는 모깃소리에 잠자리를 털고 말았다. 불을 켜고 소리 낸 놈을 추적하려다 보니 아예 잠은 멀리 보내야 했다. 내친 김에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불면의 ‘한여름 밤의 잡상(雜想)’을 끄적이게 되었다. 60년대 전깃불이 없던 시골 벽촌에서 산 이들이라면 ‘7월의 공포’(?)란 말에 공감을 표할 것이다. 중복(中伏)을 전후한 7월 한여름 밤의 모기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흔히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게 되면 ‘학(瘧)을 뗐다’라고 하는데, 이는 무서운 질병 말라리아를 ‘학질(瘧疾)’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병의 감염원이 모기라는 사실에서 그 위험성을 알게 한다. 대개 외양간 같은 가축우리와 화장실 문을 개방하고, 논이나 개울 같은 물을 가까이하는 주택 구조 때문에 모기의 극성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유일한 대처법은 기껏 등잔불을 끄고 모깃불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린 나이로서는 모기에 대해 증오와 공포를 느낄 만도 한 것이다. 모기에 대해서는 조상들도 극히 증오를 표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이 시 ‘모기를 증오함(憎蚊)’에서 "몸통도 그리 작고 종자도 천한 놈이/어째서 사람을 보면 침을 그리 흘리느냐”라고 투정하고 "부리 박아 피를 빨면 족함을 알아야지/어찌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주고 가냐”라며 공포를 드러낸 데서 알 수가 있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생태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다는 데서 알 수가 있는데, 그 결과를 인용하면 이렇다. 모기는 1억 7천만 년 전에 출현하여 3천 5백여 종으로 진화했고, 암컷은 한 번에 100~200개씩, 한 달에 3~7번 알을 낳는데 매일 수십억 마리를 탄생시킨다. 암컷은 수컷과 단 한 번 짝짓기 하여 일생에 필요한 모든 정자를 받아 몸속에 저장했다가 조금씩 꺼내 수정해 알을 낳는다. 흡혈하는 종은 200여 종으로 이들은 보통 초속 0.5m로 나르며 소리를 낸다. 부리는 톱날침과 바늘침 1쌍씩과 흡혈관 1개로 자기 몸무게의 2~3배나 되는 6~9㎎을 흡혈하며 이때 내뿜는 액(液)으로 발병을 시킨다. 이 액의 독성(毒性)으로 학질을 일으켜 매년 72만 명을 사망하게 한다. 이는 광견병으로 죽는 사람은 2만 5천 명, 뱀에게 물려 죽는 사람은 5만 명, 전쟁이나 테러 등에 의해 죽는 사람은 47만 명이니 ‘지구상 가장 치명적인 동물’일 수 있다. 극히 작은 액의 독성이 치명적이라니 그저 귀찮은 존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될 만도 한 대상이다. 잠 못 들게 한 모기를 미워하다 보니 자정을 막 넘기는 순간이다. 이때 나와 같이 잠 못 드는 이가 또 있었다. 경쾌한 이메일 도착 벨이 울려 열어 보니 조치원에 사는 지인 Y가 먹고 남는 복숭아를 보내려 하니 새 주소를 알려 달라는 내용이다. Y는 10여 년 전 ‘복숭아 축제’를 기획했던 지역문화 운영에 탁견을 가진 분이다. 매년 맛있는 복숭아를 보내주는 분인데, 큰 모자를 쓰고 땀을 흘리며 복숭아를 따는 환한 모습을 떠올리니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리고 나를 40여 년 전의 한 기억으로 내달리게 한다. 기억 속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1975년 12월 24일, 훈련소 입소를 위해 친구와 함께 논산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이때 여인숙 근처의 작은 식품점에서 복숭아 한 무더기를 보고 호기심에서 모두 샀다. 안주를 겸해 샀는데 매우 특별한 맛을 보았다. 말랑하면서 향이 매우 강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 복숭아는 10월 숙기(熟期)를 거쳐 11월 첫눈을 맞고서 수확하는 ‘설(雪)아’라는 백도 종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한겨울까지도 보관이 된다는 데, 당도와 향이 일반 복숭아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 이후 나는 복숭아에 대한 암묵지(暗默知)를 갖게 되었고, 여름 과일로 참외나 수박보다는 복숭아를 꼽게 되었다. 오래 전의 경험이지만 회상하면 크리스마스 이브의 쓸쓸함과 삭발의 허전함을 채워준 그 친구가 그립고, 향과 맛으로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만든 그 겨울의 복숭아가 떠올라 입맛을 다시게 된다. ‘복숭아’는 원래 이름이 '복셔ᇰ(화)'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복사꽃을 뜻하는 ‘복셔ᇰᇰ+花’를 열매까지 뜻하게 되어 ‘복셔ᇰᇰ화-> 복숭아’로 변화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복숭아는 전 세계에 약 3천여 품종이 있는데, 원산지는 중국이고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양으로 전해졌고 17세기에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퍼지게 하였다. 중국 명대(明代)의 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9천 년이 걸려 익는 과일을 먹고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과일이 복숭아인 판타오(蟠桃)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야생의 돌복숭아가 있는데, 천식, 기침, 기관지염 등의 약재로 쓰인다. 이 야생 돌봉숭아의 약성(藥性)과 강한 향으로 하여 민속적 대상으로 활용되어 오기도 한다. 그러다 오늘과 같은 품종을 갖게 된 것은 1906년 황실(皇室) 시설인 ‘원예모범장(園藝模範場)’에서 백도·천홍·대구보·백봉 같은 개량 품종 20여 종을 재배, 보급한 것으로부터라 한다. 복숭아의 주성분은 수분과 당분이며 유기산이 1%가량이다. 비타민A가 풍부한데 과육은 씨 주변이 분홍색이냐 흰색이냐로 나뉘는데 모두 아스파라진산이 많다. 발그스레한 색깔과 탐스러운 모양을 꽃으로 착각한 벌레나 벌이 많이 꼬이는 편이라 일반적으로 제맛을 볼 수 있는 기간이 초여름에서 초가을로 짧은 편이어서 제철이 아니면 맛보기가 힘든 과일이다. 식감은 익은 정도나 종류나 품종에 따라 묘하게도 다른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복숭아에도 미워해야 할 약점이 있다. 모기의 액 못지않은 독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과육과 털에 의한 알레르기이다. 이 증세는 유전적인 경우가 많은데, 항원-항체 반응의 결과로 연속되는 재채기에서부터 심한 생리적 기능까지 마비시킨다고 한다. 이런 독성을 범죄에 이용하기도 하는데,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기생충’에서 털 알레르기를 이용한 위계(僞計) 장면 같은 것이 그 예가 된다. 세상 이치가 참 묘하다. 그토록 향과 맛이 매혹적인 복숭아가 이런 독성을 지니고 있다니. 아마 맛과 향의 지나침에 대한 절제라는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싶다. 모기에서 복숭아로 이어진 잡상을 갖다 보니 잠은 점점 멀리 가버린다. 동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와있는 메일 하나를 열었다. 그런데 이 메일 내용이 나를 오늘의 현실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것은 국악계의 현안인 국악협회 사태에 대한 것이다. 현 제27대 임웅수 이사장이 선거와 관련하여 문제가 있어 차점 후보가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 때문에 이사장이 결위(缺位) 되는 사태를 맞았다. 국악계의 큰 잔치인 창립 60주년 사업도 추진하지 못하고, 코로나로 어려움에 부닥친 국악계에 전승 의욕을 추동시키지도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사실 이 협회는 명실상부한 민속악계의 최고 협의체로 국립국악원과 함께 우리 국악을 이끌고 온 주체이다. 이런 단체가 법원 결정에 따라서는 수장(首長) 없이 관선이사(변호사)로 대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관선 이사가 현 사태를 알고 관리할 수 있는 국악인이 아니고 법률가일 뿐인 일개 변호사가 선임된다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이러니 비판은 당연할 듯하다. 메일을 꼼꼼히 읽어 보니 국악협회에 대한 이 비판의 속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근래 20여 년간 시행된 이사장 선출 선거 방식에 독소조항(毒素條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투표권을 갖는 회원 자격을 매우 허술하게 규정한 조항이다. 이 때문에 후보가 회원 자격이 없는, 또는 상실된 회원들을 확보하여 회비를 일시에 대납시키는 등의 편법으로 이들의 표를 매수하여 당선되는 부당행위를 해 온 것이다. 이의 부작용으로 많은 이사장들이 당선 후 후유증을 앓거나 이번처럼 발목이 잡혀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협회 정관상의 회원 자격 부여와 회원 자격 회복에 관한 규정이 완비되지 못하였고, 규정을 무시할 만큼 무질서한 상태에서 선거가 치러졌다는 것이 된다. 당연히 관례(慣例)라는 이름으로 묵과(黙過)해 온 적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행 정관 제3장 임원선출 조항에서 "후보 등록 6개월 이전 가입한 회원만이 선거권을 갖는다.”는 등으로 자격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선거인단은 반드시 후보자의 기본적인 도덕성 검증 절차를 도입하여 시행할 것을 규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회원들의 자세도 일신되어야 한다. 국악인으로서 예술 분야에 종사한다는 자존심을 갖고 공동체 정신으로 운영에 참여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독소조항을 관례라고 안고 왔던 적폐를 단연코 단절해야 할 것이다. 뜬금없는 잡상으로 한여름 밤을 뒤척였다. 그러고 보니 독성은 증오하는 모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맛과 향으로 매료시키는 복숭아에도 있고, 전문 예능인들의 모임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는 나름의 독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 독성은 화(禍)나 병(病)을 유발하는 것이니 피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먼저 독성의 여부와 정도를 가려내는 눈을 가져야 함은 당연할 것이다. 아, 혹시 나는 누군가에게 독성을 지닌 사람은 아닌가? 잠이 확 깬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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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5흙의 소리 이 동 희 나무와 숲 <3> 며칠 후 박연은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섰다. 명분은 부모님 묘소를 참배한다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묘가 허물어졌다는 말을 듣고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몸을 뺄 수 없는 사정이었다. 청을 넣으면 안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통고를 하고 퇴청을 하였다. 혹시 왕에게 고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누가 될 것 같아 그런 언로도 택하지 않았다. 뒤에 그를 찾고 사정을 알면 오히려 칭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였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나라 일에만 매달려 있던 그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조만간 그의 빈자리를 알고 찾을 것이지만 그래서 어떻게 반응을 할지 모르지만 어떻든 터럭만큼도 누가 되고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구우일모九牛一毛만치도. 부모님의 일은 구실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데 다른 무엇보다도 좋은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라기보다 다른 구실은 명분이 약하였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 묘 생각이 마음 한쪽을 짓누르고 있었다. 집안 조카에게 부탁을 하고 아들 중우를 보내어 보수를 한다고 하였지만 늘 죄스러웠다. 직이 뭐고 벼슬이 뭐길래 아버지 어머니의 잠자리를 편하게 해드리지 못한단 말인가. 다래의 일로 그런 생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와의 계획으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녀가 부모보다 먼저였던지 모른다. 그렇게 빈정대도 할 말이 없다. 그만큼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없이귀하게 대하며 끔찍하게 여겼다. 어느 자식보다 누구보다 소중한 애물이었다. 그에겐 제자란 말이 그렇게 살갑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을 다 주고자 했고 아는 것을 다 가르쳐주고자 했다. 어떤 것이나 무엇이나 다 쏟아 그녀의 입속에 몸속에넣어주고 싶었다. 그것은 스승이다 제자다 라기보다 더 깊고 높은 관계였다. 관계를 초월한 무엇이었다. 그런 존재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그동안 누누이 얘기하여왔고 또 한 사람이 그녀였다. 그렇게 말하면 좀 이상할 것 같지만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떻든 그녀를 위하여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 참배를 구실로 하여 잠시 일을 내려놓고 길을 떠났다. 잠시가 될지는 몰랐다. 뭐가 먼저였는지 따질 것은 없고 묘소 보수를 확인하고 참배를 하는 것이 구실만은 아니었다. 하사 받은 안마는 신주처럼 모셔놓고 괴나리봇짐을 지고 나섰다. 그는 말을 탈 수가 있었지만 또 한 사람은 말을 타보지 못한 것이다. "고불 대감처럼 소를 탄다면 모를까…” "그렇군!” 박연은 그녀의 얘기에 동감이었다. "유람 가는 게 아니여.” "네. 알아요.” 고생길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고행이었다. 변장을 한 것은 아니고 평복을 입고 보따리 속에도 관복은 없었다. 다래도 편하고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그렇게 입고 준비하도록 하였다. 화장도 진하게 하지 않았다. 다래가 몸을 빼는 데는 무척 힘이 들었다. 가느니 못 가느니 며칠 동안 몇 번 뒤 변동을 치다가 결국 야반에 도망을 쳐 온 것이다. "도리가 없었어요.” 양쪽에서 때려죽일려고 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박연은 생채기 투성이 다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참으로 대견스럽게 생각되었다. "고맙네. 내 말을 들어줘서.” 목숨을 걸고 와 준 것이었다. 며칠을 기다린 말죽거리 객줏집에서 만났다. "선생님 말씀인데요.” 다래는 그의 넓적한 품에 안기며 색색거리는 것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여인은 벌써부터 지쳐 있었다. "늦은 김에 푹 자고 가자고.” "그래요. 선생님!” 그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을 감고 꼬시라지는 것이었다. 지친 여인의 나약한 여체를 안은 채 그도 눈을 감았다. 참으로 귀엽고 영명한 여인이었다. 자신을 하늘처럼 받드는 여인, 이 세상 끝 어디에도 없는 영롱한 꽃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였다. 귀엽고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미모뿐이 아니었다. 행동뿐이 아니었다. 첫눈에 그녀의 재능을 발견하였다. 됐다 바로 이거다, 그는 그녀의 소리를 듣고 첫 마디에 인정을 하였다. 말로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고 느낌으로 전광석화처럼 인정을 하고 무릎을 쳤다. 그녀는 그가 만든 편경의 틀린 음을 잡아내 주었다. 그가 음악에 재질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녀는 천재적인 기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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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2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1987년 3월, 어느 고서 경매전에서의 일이다. 『매창시집(梅窓詩集)』이 출품됐다. 매창은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으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난 부안(扶安) 기생이다. 경매전에 출품된 『매창시집』은 매창의 한시를 1957년에 시인 신석정(辛夕汀)이 번역한 그 친필원고본이었다. 십육절지의 갱지 육십여 장에 만년필로 썼는데, 출품자는 이것이 신석정의 친필원고인지를 모르고 경매에 출품했다. 나는 이 『매창시집』을 보는 순간 부안의 명기(名妓)를 떠올렸다. 매창에 관한 신석정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떠올라, 혹시 신석정의 원고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치자마자 서문 끝 부분에 "丁酉比斯伐艸舍에서 辛夕汀”이란 서명이 첫눈에 들어왔다. 이 글씨는 흘림체로 씌어 있어 ‘신석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 판독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출품자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경매 마감 시간이 임박해 입찰 신청을 하려고 하니 누군가가 먼저 신청을 해 놓았다. 경합이 되었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경합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신석정 원고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자만한 탓도 있다. 모든 경매가 그렇지만 경매에서 이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건이 욕심나면 무조건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최고가를 적어 내야 한다. 『매창시집』은 욕심을 내볼만한 책이라 소신껏 가격을 적어 냈다. 곧 신청이 마감되자 P선생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오늘 신석정 원고본을 구했다!” P선생은 고서 수집에 일가를 이룬 분으로, 특히 금석문(金石文) 감식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분이다. 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P선생이 상당히 높은 가격을 써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P선생은 자신만의 단독 입찰인 줄 알고 경매 접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매장에 한바탕 폭소가 쏟아졌고, 이렇게 해서 나는 『매창시집』을 내정가 이만 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 후 이 책은 S박물관으로 들어갔는데, 가격은 구입가의 수십 배로 뛰어 있었다. 고서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구입 가격의 수십 배 되는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매전에서도 눈이 밝으면 가끔 ‘땡잡는’ 수가 생긴다. 서점 주인이 귀한 책인 줄 알면서도 싸게 팔았다면, 수집가는 응당 고마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그 가치를 제대로 몰라 싸게 팔았다면, 수집가는 고맙다는 마음을 갖기보다는 되레 그 주인을 얕잡아 보게 된다. 반대로 별로 가치 없는 책을 귀한 책인 줄 알고 비싸게 부르는 고서점 주인을 신뢰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 어찌 보면 고서점 주인은 프로이고 수집가는 아마추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서 수집에는 프로도 아마추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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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이 추천하는 휴일의 시 18: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이동순)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이동순(李東洵/1950~ ) 새해가 왔는가 미처 맞이할 겨를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길손처럼 새해는 와 버렸는가 어제 방구석에 쌓인 먼지도 그대로 내 서가의 해방기념시집의 찢어진 표지 그 위를 번져 가는 곰팡도 아직 못 쓸고 있는데 새해는 불현듯 와 버렸는가 파헤쳐 놓은 수도공사도 끝내지 못했는데 태어나리라던 아기예수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여지껏 나무에 대룽대룽 매달려 애잔한 잎들은 팔랑이는데 못다 쓴 원고뭉치는 그대로 밀려 있는데 미처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새들도 있는데 불현듯 불현듯 새해는 왔는가 기다리던 첫눈도 나리지 않고 적적한 마당귀를 덮고 있는 김장독 이엉 사이로 시궁쥐만 분주히 쏘다니는데 새해는 왔는가 헛꿈을 잔뜩 안고 돌아와 저 혼자 설레이는 놈팡이처럼 새해는 왔는가 와서 무얼 하려는가 모듬판에서 돌아오는 밤 이미 자정을 넘겨 볼에 스미는 찬 기운 텅 빈 호주머니와 마음 속으로 아무거나 새것이라면 마구 채워야 하는 걸까 해마다 와서 속절없이 가 버리는 것이 새해일까 나라는 깨어지고 깨진 틈서리는 서로 붙을 생각조차 품지 않는데 보리싹 파릇파릇 움 틔우는 저 들판이 후루룩 겨울참새를 허공에 뿌리는 그 속마음은 무엇일까 추천인:배경숙(영남민요연구회 회장) "설을 보내고 설레임이 멀어질 때쯤이면 문득 음력설을 맞는다. 그리고 음력설의 의미를 묻게 된다. 몇 년째이다. ‘후루룩 겨울참새를 허공에 뿌리는 그 속마음은 무엇일까’에 답을 찾고 있다. 내년에는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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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허프의 영감어린 피아노 아리랑, 음반 수록중국이 그 연원이 한반도라는 사실을 적시하라는 우리의 주장을 무시하고 아리랑을 자기네 것이라며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중국 김치가 세계에서 기준이라며 세계에 떠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한 문화 도용(盜用,cultural appropriation)으로, 다른 나라 문화의 독자성을 도둑질해 유용하는 절도 행위이다. 이런 이웃의 떼쓰기에 우울하던 참에 상쾌한 뉴스가 들려왔다. 14일 영국 음반사 하이페리온은 세계적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59세,Stephen Hough)의 독집 음반 ‘덧없는 인생(Vida Breve)’에 아리랑(본조아리랑)이 수록되어 발매된다고 밝힌 것이다. 허프는 영국 출신 작곡가로 60여 장의 음반을 내놓은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30곡이 넘는 자작곡을 발표한 작곡가이다. 또한 음악과 종교에 대한 책은 물론 소설까지 펴낸 작가이기도 했다. 세계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에서는 ‘박식한 피아니스트(polymath pianist)’라고 불러왔다. "한국 공연을 앞두고 말레이시아에서 친구와 점심 식사 자리에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가 뭔지 물었다. 특별한 걸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그 친구가 ‘아리랑’의 악보를 건네줬다. 단순한 아름다움(simple beauty)에 첫눈에 반했고 앙코르용으로 편곡했다. 아시아 각국에서도 이 노래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유튜브에서 들어보았는데 멜로디가 자연스럽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예상 가능한 듯하면서도 놀라움을 선사하는 선율의 모양새와도 연관이 있다. 편곡할 때도 원곡의 단순함과 전통적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했지만, 몇 군데에서는 서구적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올 6월 방한하여 공연을 예정하고 있으나 코로나로 구체적인 실행은 담보할 수 없다. 스티븐 허프의 첫 눈에 반한 ‘단순한 아름다움’의 영감어린 연주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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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박녹주의 예술과 비운의 사랑박녹주의 本名은 命伊, 雅號는 春眉, 藝名은 錄珠이다. 흔히 판소리하면 호남을 떠올리게 된다. 판소리가 거기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그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부터 4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남은 그야말로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박녹주는 영남 출신의 선배 김추월(金秋月:1896∼1933), 김녹주(金綠珠:1897∼1932),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 김초향(金楚香:1900∼1983), 권금주(權錦珠:1903∼1971) 그리고 후배였던 이소향(李素 香:1905∼1989), 신금홍(申錦紅:1906∼1942), 신숙(愼淑:1916∼1982), 오비취(吳 翡翠:1918∼1982),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嬉:1921∼1993), 박초향(朴楚香:1 923∼1964) 등과 함께 달구벌을 판소리 고장으로 만든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박녹주의 은퇴공연이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날 무대에서 박녹주는 "여러분들을 이 자리서 보고 언제 다시 뵐지 이제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무대생활은 마지막입니다. 소리가 잘못되더라도 허물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략한 인사말과 함께 단가 <백발가>와 흥보가 중 <박타령>을 불렀다. 박녹주는 울먹이며 간신히 <백발가>를 마쳤다. 객석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은퇴 공연은 부산, 대구, 대전으로 이어졌다. 박녹주는 1905년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박중근, 모친은 권순이이며 박녹주 밑으로 남동생 태술, 만호, 만술이 있었다. 박록주의 어릴 적 이름은 모친의 이자를 딴 命伊였다. 박녹주의 부친은 한량으로 집안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냈고, 그리하여 박녹주는 10살 때부터 모친을 도와 농사짓고 소를 몰며 물레도 돌리며 억세게 자라났다.박녹주는 그녀의 아버지가 박수무당으로 소리선생도 겸했던 터라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접하면서 자랐는데 1916년 그녀가 12세 때, 그녀가 살던 선산에 협률사 공연이 있었다. 협률사는 소리, 춤, 줄타기, 등의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인데, 박녹주의 부친이 이 공연의 판소리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평소 목소리가 우렁찬 박녹주를 명창으로 길러내 그녀가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노름과 술값으로 쓰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부친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박기홍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그녀의 부친은 딸에게 명창이 되라며 命伊라는 이름 대신 錄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박녹주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약 20시간 동안 꼬박 소리를 질러가며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소리할 때의 자세가 매우 엄했고 사설은 거의 한문 투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음식은 참기름만 먹었고 고된 연습으로 목에선 피가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지옥훈련 같았던 박기홍의 가르침으로 판소리의 기틀을 확고하게 갖춘 그녀는 그때부터 경상도 곳곳에 초청되어 다니며 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나 사례비가 생기는 족족 그의 부친이 술값으로 써버렸다. 그러던 그녀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그녀는 김창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김창환은 좀처럼 소리를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듣고 그저 따라하도록 지시할 뿐이었다. 박녹주는 김창환이 무대에서 부르는 <제비노정기>를 유심히 듣고 모르는 것을 물어보며 한 구절씩 익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택에 김창환의 <제비노정기>가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박녹주의 세 번째 스승인 강창호는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실력이 대단했고, <심청가>에 장기가 있었다. 그녀는 수궁가 중 <고고천변>을 두 달 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 소리를 배운 뒤 그녀는 다시 부친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가서 억지로 기생 수업을 받게 된다. 그녀의 부친은 박녹주를 당시 달성권번의 행수기생이던 鸚鵡에게 3년동안 양딸로 맡기는 대신 2백원을 받았고 박녹주는 행수기생의 소유가 되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앵무는 너그러운 품격의 소유자였고, 재주가 뛰어난 박녹주를 아꼈다. 박녹주는 앵무를 통해 기생수업을 받으면서 춤, 시조, 소리 등을 연습했으며 예의바른 행동거지를 배워나갔다. 그러던 중 그녀 나이 15세 때 李某라는 한량이 박녹주의 딱한 처지를 듣고 2백원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일이 생기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박녹주였지만 그녀는 또다시 아버지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갔다. 역시 기생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때 그녀는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에게 남도민요 <육자백이>와 <화초 사거리>를 배우게 된다. 당시 그녀는 김초향 다음 가는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하룻밤 초청되어 가면 10원을 받았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가 50전 할 때의 일이니 그 명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무렵 충청도의 갑부 변씨가 그녀에게 화초머리를 얹어주고 세간을 사주었다.1922년, 박녹주는 서울로 가서 송만갑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 중 <사랑가>부터 <십장가>까지를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1923년 그녀는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눈부신 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전성기를 보내던 1928년 봄 그녀는 조선 극장에서 열린 8도 명창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공연이 끝난 후 두 사람이 그녀를 찾아가는 데 한 명은 전 부통령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영감이었고 다른 한 명은 김유정이었다.김유정의 박녹주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은 그녀가 평생 사랑의 고달픈 행로를 걸어야 했던 전주곡의 시작과도 같았다. 원래 김유정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지주였고,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었지만 서울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집안을 관리하던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린나이에 부모 모두를 잃고 외롭게 성장기를 보냈던 그는 늘 어머니 사진을 품고 다니며 연상의 여성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초였다.박녹주에게 첫눈에 반한 유정은 그날 이후 심한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다. 유정을 매일 밤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연모의 마음을 글로 옮겨 보냈다. 편지를 받고 무척이나 당황했던 녹주는 편지를 다시 하숙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이번엔 레코드판에서 뜯어낸 자신의 사진 밑에 ‘당신을 연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적힌 편지가 전해져 왔다. 하루가 멀다 오는 편지를 보며 근심하게 된 녹주는 행랑어멈을 시켜 유정을 오게 한 뒤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딴 생각을 하면 아니 된다하고 자신은 기생의 신분임을 내세워 조용히 타일러 보았지만 이미 유정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녹주의 동생 태술이 유정을 달래어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날로 태술과 친해진 유정은 친구 태술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녹주의 집을 찾아갔고, 태술을 통해 편지를 직접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녹주의 마음은 요지부동으로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협박과 공갈 등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음은 박녹주가 「한국일보」에 38회 연재(1974. 1. 5~ 2. 28)된 「나의 이력서」에 고백한 내용이다. 우리는 그 자료를 통해 유정이 박녹주에게 한 말의 내용과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살펴 볼 수 있게 되고 유정의 슬픈 집착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척 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이 나한테 죽이겠다고 협박편지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김유정이 나를 부른 칭호도 금새 달라져 갔다. 처음에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 하루는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검은 그림자가 인력거를 향해 돌진해왔다. 직감적으로 김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력거꾼에게 정거하지 말고 빨리 앞으로 달려가라고 소리쳤다. 김유정은 번쩍이는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칼이다’ 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력거꾼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김유정이 더 빨랐다. 그는 인력거채를 움켜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녹주, 오늘 밤은 너를 죽이지 않으마. 안심하고 내려라.”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하얀 몽둥이였다. 그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대더니 불뿜는듯한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너는 혹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지?” 나로서는 너무나 의외의 질문이었다. 잘못 대답하면 내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천한 여자가 될 것만 같았다....."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이 정도의 협박편지가 들어온 것은 그해 즉 1928년 겨울쯤이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편지는 잉크로 쓴 게 아니라 혈서였다.이렇듯 유정의 감정은 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박녹주는 직업상 사람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일상은 활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늘 어디론가 가서 소리를 하는 그녀를 문 밖에서 기다리며 나올 시간만 기다렸지만 끝내 나오지 않으면 온갖 상상을 일삼으며 그녀를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이었다.박녹주는 유정이 구애하는 동안 매년 그를 피해 피서를 가는데 1928년에 한 달, 그리고 1929년에는 두 달동안 원산에 있는 삼방 저수지에 머물며 창 공부를 한다. 그녀가 종적을 감춘 동안 매일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초조해하던 유정은 감정이 한층 더 격해진다. 후에는 그의 감정이 연모의 감정인지 혹은 복수의 감정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가 된다. 이 때 그의 음주량은 그의 몸 상태에 비해 과도했으며, 늑막염을 앓고 있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상태였다. 혈서를 쓰고, 협박을 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의 행동은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오히려 역효과만을 낳을 뿐이었다. 박녹주가 자신은 소리하는 사람이므로 학생과 연애할 수 없다고 하자, 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고 대들며 사랑이란 국경이 없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미 남의 소실이었던 박녹주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는데, 부친 문제 등으로 인생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던 박녹주가 일주일여만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바로 유정이었다. 그는 "당신 장례를 치루려고 기다렸다” 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을 보면, 유정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아주 서툴거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정은 박녹주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음에 큰 상처를 입어 학교도 그만두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간 1930년 여름부터 그가 타계하는 1937년 봄까지 약 7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3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쓰지만 유정의 가슴앓이는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이어져 결국 나이 서른에 눈을 감는다. 이때의 작품 중 「생의 반려」와 「두꺼비」는 그와 박녹주의 관계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룰 수없는 사랑에 대한 유정의 恨은 그렇게 작품 속으로 용해되고 승화되어 갔던 것이다.김유정과 같은 시기에 알게 되었던 김경중은 박녹주의 소리일생에 지대한 영향과 주게 된다. 김경중은 8도 명창대회에서 박녹주의 모습에 반하여 그녀에게 집을 한 채 선사하는 등 아낌없이 그녀에게 베품을 주었다. 그 뒤에도 김경중은 박녹주를 귀애하며 그녀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이 가혹해 먹고사는 것이 힘든 사정이었고, 박녹주는 한량인 아버지에 의해 착취당하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경제력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생수업을 받고 2백원에 팔려 다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15세 때는 임준옥과 사랑에 빠졌다가 부친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고, 17세 되던 1921년에 열린 원산 명창대회에서 남백우와 만나 이내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첩이었고, 그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수많은 역경을 통해 그녀는 이미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경험했었고, 누구보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낭만적이고 현실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김유정과의 사랑을 받아드리기에는 그녀의 굴곡많은 삶이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김경중은 1929년에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에게 박녹주가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어 21일동안 김정문에게 흥보가 중 초입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까지를 배우게 된다. 이 때 배운 소리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 데>는 흥보가 중에서 박녹주가 가장 즐겨 불렀던 대목이다. 박녹주는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온 1929년 3월, 부친에 대한 원망과 복잡한 가정사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을 기도하게 되는데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다.자살 소동 이후 몸을 회복하게 된 박녹주는 1930년, 다시 김경중의 권유에 따라 김정문에게 <심청가>를 배우기 위해 남원으로 가서 열흘 동안 심청가 전 바탕을 익히게 된다. 김정문은 송만갑이 "제자가 무섭다.”고 할 정도로 극찬한 명창이었다. 김경중의 후원이 없었다면 김정문의 <심청가>의 전승이 끊어질 뻔했는데, 다행이 박녹주를 통해 전승되어 온 것이다. 남백우의 첩으로 사는 데 회의를 느낀 박녹주는 이별을 결심하고 申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여 함께 살다가 1931년에 김종익과 재혼하게 된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갑을 위해 조선성악연구회의 사무실로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59번지에 있던 9천 5백원짜리 건물을 사주었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양반 등 상류계층이 몰락하게 되자 전통음악인들은 돈 많은 한량과 서민을 상대로 공연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그런 장소에 음악인들을 공급하는 구실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박녹주는 생활을 했고, 송만갑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박녹주는 김여란, 이기권과 함께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을 배웠는데, <숙영낭자전>은 전승이 끊어진 판소리로서 정정렬이 창작해서 불렀고 그것을 박녹주가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성준에게서 <수궁가>를 익혔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창극을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이 때 박녹주가 춘향 역할을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춘향을 직접 보려는 관중으로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40년 박녹주의 부친이 타계했다. 박녹주는 한평생 부친을 원망하며 살았으나, 막상 그가 타계하자 며칠 동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박녹주에게 있어 예술과 사랑의 길 모두가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 훗날 그녀는 아편흡입과 아편소지 매매 등의 죄명으로 공판에 회부되고 철창에서 탄식하는 절망의 날들을 맞기도 했으니 말이다.박녹주는 여류명창이면서도 매우 남성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데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가 투박하고 꿋꿋한 소리제를 구사했던 것은 그가 남자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던 데 가장 큰 이유가 있겠고, 또 그가 타고난 성음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며 그의 고난에 찬 인생살이가 그를 강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녹주의 제자인 이옥천은 박녹주의 소리를 가리켜서 "통이 크고 박력이 있으며, 부드럽기 보다는 꿋꿋하며, 맺고 끊음이 무섭다.”고 평했다. 박녹주는 대체로 전바탕 공연보다는 토막소리 위주로 공연을 하였기 때문에 아니리는 극히 짧으며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멋이 있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전라도 지역이라서 전라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산에서 태어난 박녹주는 경상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매우 특이하다. 남성을 능가할 정도의 통성을 위주로 해서 소리를 끌고 나가며 소리 맺음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고 분명하다. 이런 박녹주소리의 특징이 「?조선 창극사」?에는 모지락스럽게 맺고 끊는다고 적혀 있다. 성음은 엄성이 많이 쓰이고 정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각 대목마다 상황에 맞게 성음, 장단, 선율에 변화를 주어 이면을 살려내는 기량이 출중하다. 또 서편제의 더늠을 부르더라도 동편제의 특성을 가미해서 소리가 매우 진중하다. 이러한 박녹주의 소리는 별로 힘 안들이고 쉽게 부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엄청난 공력을 내보인다. 또한 박녹주는 발림이 요란하지 않았다. 발림보다는 성음과 선율에 변화를 주어 목소리만으로 각 대목의 상황을 적절히 묘사해냈던 것이다.1940년대 후반에 박녹주는 국악계가 남자들 편의 위주로 운영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김소희, 박귀희 등을 이끌며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판소리계에서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고집한 박 녹주가 남긴 음반은 명물로 꼽히며, 40년대에 김소희.박귀희 등과 함께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는 남성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판소리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6. 25 발발 후에는 월북을 강요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6. 25때 그녀는 오태석, 김세준, 박춘홍, 조농옥, 이용배등 30여명과 함께 방위대에 입대하여 군인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이러한 박녹주는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였고 인간문화재로 소리판을 지켜냈다. 박녹주의 콜럼비아에서 나온 음반이 인기를 끌자 여러 음반회사에서 앞다투어 그녀의 음반을 제작했다. 박녹주는 음반 취입, 무대 공연, 잔칫집 초청 공연 등으로 돈을 벌어 월수입이 무려 5-6백원이나 되어 자가용차를 전세내어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축하는 성품이 아니어서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리곤 하여 말년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박녹주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서 50대 전반기였던 1955년~1960년에 가장 좋은 소리가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가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어 대다수의 국민이 음악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에 음반 제작이 활발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6. 25 이후부터는 유랑극단 생활을 통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녀는 1960년 초에 급성 폐렴을 얻어 경찰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때 그녀의 유랑생활은 끝이 났다. 그녀는 젊을 때 벌어놓은 돈을 저축해 놓지 않아, 6. 25 이후에는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렵게 삶을 꾸려나가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1965년 박녹주는 김여란, 김연수, 김소희, 정광수, 박초월과 함께 <춘향가>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대상이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확대되면서 그녀는 <흥보가>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박녹주의 은퇴공연을 하고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1970년대에 집에서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운영했다. 김소희, 한애순, 박귀희, 성우향,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이옥천, 한농선, 박송희, 정성숙, 조순애, 정의진 등이 그녀에게서 소리를 배웠다.1978년 박녹주는 고향인 선산에서 공연을 했다. 이 무대에서 그녀는 <백발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소리를 하면 할수록 폐가 붓는 지경으로 몸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녀가 74세의 병든 몸을 이끌고 고별무대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생각하면 징그럽도록 사연도 많고 한도 많았던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단가 <백발가>를 목놓아 부르자 객석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해버렸다. 그러던 1979년 5월26일 오후 1시, 시대의 명창 박녹주는 셋방을 전전하다가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혈육한 점 없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그에게는 오직 양아들로 맞아들인 조상현이 있을 뿐이었다.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 화강석 장구와 북을 깔고 앉은 ‘인간문화재 제5호 박녹주(朴綠珠:1905∼79)여사 기념비’가 외롭게 서 있다. 1981년 세워진 이 비석의 주인공 박녹주는 젊어서는 대구 달성권번, 서울 한남권번의 名妓로 이름을 날렸고, 늙어서는 동편제의 거목으로 판소리<춘향가>, <흥보가> 분야 인간문화재로 예우를 받았지만, 삶 자체는 판소리 서편제처럼 너무나도 서글펐다. 조상현, 박송희, 신영희 등 그의 뜻을 기리려는 후학 들은 매년 그녀가 타계한 5월26일, 비석 앞에서 판소리 한마당으로 기제사를 올린다. 지금은 구미문화연구회 등이 주축이 되어 추모사업회가 구성되었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전국국악대회도 2001년부터 매년 10월 열리고 있다.(출처:한국컨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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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7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옛날에 준마를 팔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흘 내내 그 말을 시장에 내놓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준마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이에 말 주인은 백락(伯樂)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게 준마가 있어 팔려고 하는데, 사흘 동안이나 시장에 내놓았는데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제 말을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그리고 자리를 떠나시다가 아까운 듯한 표정으로 한번 뒤돌아봐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 하루 벌이를 그 대가로 드리겠습니다.” 이에 백락이 말을 살펴본 후 그 자리를 떠나다가 한번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하루아침에 말의 가격이 열 배로 올랐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시대 진(秦)나라 사람 손양(孫陽)은 말 감정에 조예가 깊은 명인으로, 그의 탁월한 안목과 식견에 탄복한 사람들은 천마(天馬)를 주관한다는 별의 이름을 따 그를 본명 대신 ‘백락’이라 불렀다. 어찌나 정평이 높던지 그의 품평 한마디에 말 값이 순식간에 몇 곱절씩 뛰어오를 정도였다. 고서 수집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고서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이 어떤 책에 관심을 보이면 그 책은 비싼 가격으로 팔리기도 한다. 언젠가 청계천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친분 있는 지인으로부터, 지금 막 모 서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책을 보았으니 서둘러 가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곧장 달려가니 주인이 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책값은 방금 전화로 전해들은 값의 두 배를 불렀다. 아무 말 않고 돈을 건넨 뒤 책을 들고 나왔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 책값을 두 배로 올렸는데, 이처럼 고서점 주인이 손님에 따라 가격을 달리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손님이 책의 내용을 잘 알아보는 듯하거나 꼭 필요해서 살듯 한 경우에는 이런 수법을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따지고 들면 서로 관계만 어색해지니 그냥 모른 척한다. 그날 구입한 책은 『홍전시략(紅田詩略)』 필사본이었다. ‘홍전시략’은 표제이고 속표제는 ‘자하시집(紫霞詩集)’이라고 씌어 있었다. 자하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화가·서예가로 유명한 신위(申緯)의 호다. 책 윗부분이 조금 손상됐지만 됨됨이가 반듯한 것이 첫눈에 귀물이었다. 시종일관 단아한 글씨로 아주 정성스레 만든 필사본이었다. 대부분의 필사본이 그렇지만 문제는 누구의 친필인가 하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필사본 중에는 해서(楷書)로 쓴 글이 많은데, 이 경우 누구의 글씨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글씨가 그랬다.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것으로, 파세(波勢)가 없고 방정하게 정서(正書)했다. 또 목판 괘선지의 판심(版心) 아래 어미(魚尾) 상부에 안경 모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 이채로웠다. 순간 나는 자하의 친필임을 직감했다. 그러니 책값을 두 배로 불러도 안 살 도리가 없었다. 그날 N씨가 호산방에 들렀다가 이 책을 보더니 갖고 싶다고 했다. 당시 그는 청량리 근처에서 꽤 규모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책을 사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늦게나마 책을 사 본다고 했다. 그는 고서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내 말이라면 그대로 믿고 따랐다. 그리하여 결국 이 책은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 주일쯤 후, 나는 우연히 어떤 책을 보다가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몽홍선관시초(夢紅仙館詩抄)』를 발견했다. 이 책은 자하의 친필로 알려진 책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괘선지의 판심에 『홍전시략』의 안경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N씨에게 보낸 『홍전시략』 괘선지의 문양과 연세대 소장본 『몽홍선관시초』의 그것은 분명 일치했다. 이 괘선지는 바로 자하의 전용지였던 것이다. 또 한번은 한 서점에서 이삼십 권의 책을 골라 놓고 각 권에 대한 가격을 셈하는데,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처음에 말했던 것과 달랐다. 조금 전에 부른 가격을 주인도 헷갈려 하는 것이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고서에는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고서점 주인의 재량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렀다 하더라도 손님과 주인의 관계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고서점의 생리다. 가령 손님이 "이것은 그렇게 비싼 책이 아니고 이 정도면 적당할 것 같소” 하면 주인은 못 이기는 체하고 적당한 선에서 고객의 요구에 응한다. 이러한 예가 고서점에서 관례가 된 풍경이다. 어찌 보면 이렇듯 같은 책이라도 고서점마다 가격이 다 다른 것이 고서 수집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고서점 주인은 고서를 입수한 후 가격을 정하기까지 나름대로의 고민과 연구를 거듭한다. 가격을 정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그 중에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손님에게 책을 보여 주면서 눈치를 살피는 경우도 있다. "이거 소장자가 팔아 달라고 맡긴 건데, 얼마에 사면 되겠소?” 그러면 자연스레 얼마에 팔면 되겠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만약 그 과정에서 손님이 그 책을 욕심내면 주인 입장에서는 머쓱할 수밖에 없다. 손님이 되레 주인에게 "그래, 소장자가 꼭 얼마를 받겠답디까?” 물으면, 주인이 "이거 소장자가 얼마를 받아 달라는데” 하면서 아주 높은 가격을 던져 보기도 한다. 이처럼, 서점 주인들은 낯선 책의 가격을 알아보는 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요령을 가지고 있다. 설령 자신이 제시한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도 민망해 할 까닭이 없다. 이미 ‘소장자가 맡긴 물건’이라고 복선을 깔았기 때문이다. 또 심상치 않은 고서를 입수하면 일단 가게 한구석에 무심한 척 놔두고는 손님이 물어 올 때를 기다린다. "이거 얼마요?” "그건 팔 물건이 아닌데….” "…….” "굳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나 주겠소?” 이때 손님은 책이 욕심나면 나름대로 가격을 제시하는데, 그러면 십중팔구 그 책을 사지 못한다. 주인이 생각했던 가격보다 높으면 혹시 이것이 아주 귀한 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쉽게 팔지 않을 것이고, 생각했던 가격보다 낮으면 적당히 거절한 뒤 다른 손님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쓴다. 나는 이런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격을 잘 몰라서 나보고 얼마면 사겠냐고 물었을 텐데, 그럼 내가 제시하는 값에 무조건 팔 겁니까? 그렇다면 성의껏 말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꼭 받고 싶은 값을 먼저 말하십시오. 값이 적당하면 사겠습니다.” 나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절대로 가격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저렇게 묻는 것은 얼마가 되더라도 애당초 나에게 물건을 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잔꾀를 부린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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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5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자기만족형 수집가는 철저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고서를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 어찌 보면 자신만의 철학과 주관을 갖고 수집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는 어느 정도 이상 고서를 보는 안목이 따라 줄 때 얘기지, 그렇지 않다면 어이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계룡산 기슭에 한 도인이 있었는데, 바둑을 잘 두어 근처 백 리 안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었다. 도인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바둑을 두고 있는 젊은이를 보고는 대국을 청했다. 내리 세 판을 진 도인은 도무지 그 결과가 믿기지 않아, 다음날 다시 그 젊은이를 찾아가 바둑을 두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래 전 어디선가 들은 얘기다. 이 이야기 속의 도인은 자신의 바둑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자기보다 실력 있는 고수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 본인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도 그의 바둑 실력이 천하제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고서 수집가 중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 많아, 그들의 모습에서 저 계룡산 도사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소장한 장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방식대로 고서를 수집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혼자 흥겨워하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에 고서를 전혀 모르는 주위 사람들이 끼어들어 자연스레 한몫 거든다. 바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수집가들이다. 이런 부류의 수집가들은 대개 다른 수집가들과 교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설령 교류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관심 분야 이외에는 애써 외면한다. 어찌 보면 고서를 보는 안목이 있고 주관이 뚜렷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유형의 수집가는 앞의 정보탐색형 수집가와는 달리 다른 수집가들과 정보교환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고서 수집에 관한 자신의 실력이나 컬렉션의 수준이 알려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소위 우물 안 개구리 격이라고 할까. 장안평 호산방 시절, 하루는 젊은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 고서가 있으니 한번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다. 찾아가 보니 작은 연립주택이었는데, 거실부터 집 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안방과 작은방에도, 창문마저 가릴 정도로 온통 책이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보다 쌓여 있는 책이 더 많았다. 주로 양장본이었고 한적도 약간 있었다. 한적은 주로 칠서(七書) 낙질이었고, 양장본은 상당수가 일서(日書) 전집류 낙질들로, 상태는 모두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가져가라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을 책들이었다.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책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도 금방 자리를 뜨기가 민망해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주인이 말을 건넸다. "선친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책들은 선친이 수집한 거예요. 선친께서는 평생의 꿈이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자식 된 도리로 선친의 꿈을 이루어 드리고 싶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이 책들을 처분해 아파트라도 하나 마련할까 해요.” 고인이 된 책 주인의 따님과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인의 말이다. 한마디로, 이 책들을 제대로 평가해 준다면 팔겠다는 얘기였다. 이런 경우 참으로 난감하다. 유족들은 선친이 남긴 고서를 천하의 보물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 가치가 별것 아니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낙담할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그저 싸게 사려는 장사치의 수작이라 생각할 터였다. 어떻게 호산방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 물으니, 고서를 정리하다 『호산방도서목록』이 눈에 띄어 전화를 했다고 한다. 혹시 고인이 내가 아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으니, S씨다. S씨라면, 호산방에는 두어 번 들렀지만 다른 모임에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분이었다. 자그마한 키에 쥐색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별로 말이 없는 차분하고 온화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고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그 양과 질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어, 그렇잖아도 궁금해 하던 차였다. 그러나 장서들을 본 순간 나의 머리는 혼란에 빠졌다. 평생 고서를 수집한 분의 장서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서 중 일부를 빼돌린 것 같지도 않았다. 다시 책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때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언젠가 그와의 대화 중에 ‘왕지(王旨)’를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교지(敎旨)’가 아니라 ‘왕지(王旨)’라고 씌어 있습니까?”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관작(官爵)·자격·시호(諡號)·토지·노비 등을 내려 주는 문서로, 조선 초기에는 왕지라고 했다. 조선 중기 이후의 교지는 그 수가 많이 남아 있어 고서점이나 골동품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지는 매우 귀해, 그것을 내린 인물에 관계없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유족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왕지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 아버님이 왕지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을 비디오로 찍어 놨습니다.” 비디오 화면을 통해 본 왕지는 바로 구한말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교지였다. 화면 속에서 교지를 설명하는 S씨는 자못 진지했다. S씨의 설명만 들으면 교지의 가치는 천하의 보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왕지를 한번 볼 수 있느냐고 청하니 잠시 망설이다가 커다란 스크랩북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방금 비디오 화면에서 본 바로 그 교지를 포함해 지금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호구단자(戶口單子)와 토지문서 몇 장 그리고 신문과 상표 등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고인은 이 책들을 수십 년에 걸쳐, 주로 고물상과 동네 고서점에서 수집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이렇게 전혀 쓸모없는 고물만 수집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두세 달 후에 이 책들을 청계천에서 다시 만났다. 결국은 고인이 생전에 이 책들을 수집했던 것처럼, 이것들은 다시 고물상을 통해 청계천으로 나온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계룡산 도사 생각이 났다. 노련한 고서점 주인이라면 수집가의 말 몇 마디만 듣고도, 그 사람의 수집 경력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어느 분야의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몇 년 정도 수집을 했는지, 소장한 장서의 양과 질은 어느 정도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웬만한 수집가의 머릿속은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속내를 알 수 없는 수집가가 있다. C회장이 바로 그 중 한 사람이다. 건설업에 종사했던 그는 고서계 일부에서 ‘C회장’으로 통했다.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수집한 분야는 천세력(千歲曆)이었다. 천세력은 백중력(百中曆)과 만세력(萬歲曆)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매년 매 음력월의 대소(大小), 이십사절후의 입기일시(入氣日時), 매월 초일일·십일일·이십일일의 간지(干支)가 실려 있는 책이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세력 이야기로 화제를 끌고 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슨 얘길 하는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서치고 귀하지 않은 책이 어디 있겠는가. 고서 수집은 수많은 종류의 책 가운데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릴 만한 분야를 정해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C회장은 그것을 천세력으로 정한 것 같았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천세력을 수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세력에 쏟은 그 열정을 다른 분야의 고서에 쏟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보곤 했다. 근 3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고서를 좋아하는 지인 몇 분과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방마다 책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장서를 보고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것은 평생을 고서 수집에 열중한 사람의 장서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애서가의 서재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누구라도 그 오랜 세월 고서를 수집했다면 그 정도의 서재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다. 그의 장서에서는 고서를 수집하면서 고민하고 애쓴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장서를 폄하하려는 말이 아니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과 열정으로 책을 수집하면서, 정작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수집에만 급급했지, 수집 목적과 이에 대한 활용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장서에서 천하의 진본이라든가 고가의 귀중본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오랜 세월 고서를 수집했다면, 적어도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눈을 즐겁게 하는 귀중본 몇 권 정도는 눈에 띄었어야 했다. 그것을 천세력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고서보다는 주로 고서화나 골동 수집가 중에서 수집을 잘못해 패가망신하는 사람을 더러 보았다. 골동을 수집하는데 어떻게 패가망신하느냐고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30여 년 전쯤에 K씨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고서 수집가가 그렇듯이, 현관에 들어서자 벽에는 온통 고서화가 걸려 있고 집 안에는 고서와 골동이 즐비했다. 반닫이에서 서첩과 간찰첩 등을 꺼내 보여주는데, 퇴계·율곡·다산·추사 등 눈에 띄는 인물들의 작품이 한다발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하나같이 모두가 가짜인 것을. 명인의 것은 가짜투성이고 누군지 알 수 없는 그저 그런 작품들은 진짜이니, 결국 모두가 가짜라는 말이 아닌가. 더 보여주겠다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러고 몇 년 후, 그의 소장품 중 일부가 유명 기관에서 주최하는 전시회에 출품됐다. 물론 가짜 글씨도 여러 점 섞여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가짜 그림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평생 쌓아 온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수집품이 가짜라고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정말 그 소장품들을 가짜인 줄 모르고 수집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사진 32) 특히 서화 골동 세계에서 가짜를 사고파는 행위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몰라서 사고팔고, 알면서도 사고판다. 서로 가짜인 줄 알고 사고파는 것으로 그친다면 모르겠으나 이것들이 언젠가는 진짜로 둔갑해 세상에 돌아다니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다.(*사진 33) 가짜 고서화와 관련해서, 대부분의 고서화 수집가에게는 고약한 버릇이 하나 있다. 살 때는 가짜라도 좋다며 싼값에 산 물건이라도, 일단 자기 것이 되면 혹시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K씨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40여 년 전 고서화 수집가로 꽤 알려진 궁정동 P사장이 있었다. 하루는 그의 집에 초대받아 갔더니 방마다 온통 고서화로 그득했다. 역대 유명 서화가의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값이 나갈 만한 것들은 첫눈에도 모두 가짜였다. 그러나 이런 수집가를 이미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고서화를 수집하는 사람 중에는 거짓말처럼 가짜만 일관되게 수집해 놓은 수집가가 더러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서화를 수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가짜를 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가짜보다는 진짜가 더 많아야 할 게 아닌가. 일부러 가짜만 수집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원인은 수집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개 이런 수집가일수록 고서화에 대한 지식은 얕으면서 무조건 유명 서화가의 작품만 수집하려 한다. 일단 이런 수집가들은 남의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안목을 과신한다. 또한 이런 수집가 주위에는 불량한 거간꾼이 항상 끼어들게 마련인데, P사장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이런 거간꾼들은 수집가와 연결된 사업적 소통관계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 철저하게 가짜만 수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수집가가 자신의 수집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소장품을 처분하려고 할 때이다. 그러나 그때는 중간에 끼어 있던 거간꾼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모든 상황은 끝난 후다. P사장도 그랬다. 그후 그는 몇 년 동안 이 물건들을 처분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분을 삭이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소장품들이 마치 진품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앞의 K씨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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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이 추천하는 휴일의 시 11 : 눈 (윤동주)눈 윤동주(1917~1945)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진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추천인:황정수(세종시 한누리국악원 원장) "그제 어딘가에 첫눈이 왔단다. 아마 그 곳은 추웠나 보다. 이제 내 사는 곳도 추워지겠네. 그러면 나는 포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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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3고서 수집 십계명(2)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여섯번째, 일단 구입한 책은 물르지 않는다. 수집가 중에는 한번 구입한 책을 다시 물러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물론 책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 같다고 물러 달라면 정말 어이가 없다. 만약, 구입한 책이 나중에 아주 귀중본으로 판명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번 구입한 고서는 가짜거나 주인이 설명한 내용과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 한 물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집가는 결코 좋은 고서를 수집할 수 없다. 25여 년 전 일이다. L씨가 호산방을 방문했다. 그는 평소 고서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호산방에서 고서를 구입한 적은 없었다. 『호산방도서목록』(*사진 27)에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보고 왔다며, 이래저래 살피더니 구입하겠다 했다. 모두 열 책이 한 질이고 가격은 이백만 원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값이었다. 『목민심서』는 다산 정약용의 저술로 목민관(牧民官)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고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내용의 책이다. 이 책은 1901년 광문사에서 출간되기 이전에는 필사본으로만 전해져 왔다. 『목민심서』 필사본은 지금도 가끔 고서점에서 눈에 띄지만 필체가 좋은 것은 그리 흔치 않다. 호산방에 있던 것은 필체도 좋고 책의 됨됨이가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L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열 책 한 질 중에 한 책이 『목민심서』가 아닌 다른 책이라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문제의 『목민심서』 제삼책인가가 『흠흠신서(欽欽新書)』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흠흠신서』 역시 열 책이 한 질인 다산의 저술이다. 원래 이 필사본들은 『목민심서』와 『흠흠신서』가 각각 한 질로 되어 있었는데, 『목민심서』 제3책이 낙질되어 누군가가 『흠흠신서』 제3책을 끼워 넣어 눈속임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구입 당시는 물론 몇 년이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책 모양과 장정은 물론 필체까지도 똑같아 겉으로 봐서는 다른 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각 책의 표지에는 ‘목민심서 1’ ‘목민심서 2’…라는 제목이 각각 붙어 있어 당연히 완전한 한 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흠흠신서’가 어떻게 ‘목민심서’로 바뀌었을까. 『목민심서』 표지에는 각 책마다 붓글씨로 표제가 씌어 있었다. 문제의 책에는 ‘목민심서 3’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다른 책과는 달리 ‘牧民心書’ 네 글자를 한지에 써서 덧붙인 것이었다. 그러니 수년 동안 갖고 있으면서도 책이 바뀌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L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나를 몰아세웠다. 나 같은 전문가가 어찌 이같은 사실을 수년 동안이나 몰랐을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자기는 책을 산 지 단 하루 만에 알아보았는데, 고서점 주인이 책을 살 때 책장도 안 넘겨 보았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판 게 분명하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고서를 구입할 때 여러 권이 한 질로 된 것은 권수만 헤아려 보고 구입하는 것이 보통이다. 『목민심서』의 경우도 그랬다. 책의 겉모습이 반듯하니 중간에 다른 책으로 바뀌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L씨는 책을 구입하고, 기쁜 마음에 그날로 모든 책에 장서인을 찍었다. 이 과정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L씨는 자기에게도 약간의 과실이 있을 수 있고 이미 모든 책에 자신의 장서인을 찍었으니, 자신도 일부 손해를 볼 테니 환불해 달라고 했다. 나는 모든 게 내 실수로 일어난 일이니 설령 장서인을 찍었다 하더라도 환불해 주겠다 하고 그 즉시 전액을 돌려주었다. 그래도 그는 오해가 풀리지 않은 듯, 그후로 호산방을 다시 찾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오해를 풀 방법도 없어 지금까지 두고두고 마음이 무겁다. 그날로 나는 문제의 『목민심서』의 가격을 3백만 원으로 조정했다. 2백만 원에 팔았던 책이 위와 같은 이유로 반환되었으면 가격을 낮추어야지 도리어 가격을 올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책이 호산방에 진열된 지는 약 칠 년가량 되었다. 호산방에서는 한동안 팔리지 않은 책의 일부는 가격을 상향 조정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격을 올리려던 참이었는데, 퍽 잘되었다 싶었다. 그러나 그 이유보다는, 설령 한 권이 낙질되었다 해도 그 가치가 3백만 원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석 달 후 K교수가 이 책을 사 갔다. 그의 전공은 법학으로 평소 고문서에 관심이 깊었다. 물론 나는 그에게 이 책이 반환되어 돌아온 경위와 장서인이 찍힌 사연을 모두 얘기해 주었다. 사실, 앞서 소개한 경우는 책을 반환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된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됨됨이가 온전한 것 같아 구입한 책 중에는 가끔 훼손되거나 낙장된 것들이 있다. 이런 경우, 안타깝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비록 훼손되긴 했어도 책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귀중본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내가 L씨였다면 그 책, 『목민심서』를 그냥 소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L씨에게 서운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일곱번째, 섭치 백 권보다 귀중본 한 권을 산다. 고서 중에서 변변치 못한 책을 섭치라고 한다. 섭치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유독 섭치를 좋아하는 수집가도 더러 있다. 물론 싼 맛으로 사는 것이겠지만 "지금의 섭치는 영원히 섭치다.” 결코 싼 것이 아니다. 섭치 백 권을 사느니 차라리 귀중본 한 권을 사는 것이 여러 면에서 낫다. 여덟번째, 알면 사고 모르면 사지 않는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좋은 책을 아주 싼값에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반대로 아주 비싸게 사는 경우도 있다. 좋은 책을 비싸게 사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사지 말아야 할 것을 샀을 때는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좋은 책은 아무리 비싸게 주고 샀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잘 샀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만 가짜라든가 신통치 않은 책을 사면 평생 후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서를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주고 사거나 가짜 고서화를 사는 수집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목을 과신하거나 욕심이 앞서 있다. 한마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서를 사는 것이다. 반대로, 안목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좋은 물건을 놓치지 않는다. 근 40년 전의 일이다. 골동 거간꾼 최씨의 별명은 ‘최따로’다. 그는 C시와 O시, G시 등을 무대로 고서와 골동을 수집하여 서울 등지에 내다 팔았다. 보통 거간꾼들은 시골을 직접 다니면서 집안에서 내려오는 옛 물건을 수집해 파는데, 최따로는 주로 가짜 골동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별난 이였다. 그래서 별명도 ‘가짜’라는 뜻의 ‘최따로’다. 물론 그 아류로, ‘김따로’ ‘이따로’도 있다. 그가 취급하는 가짜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글씨를 비롯하여, 민화·민속품 등 매우 다양했다. 그는 가짜 물건을 내놓으면서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추사의 가짜 글씨를 내밀면서도 능청을 떨었다. "이거 쓰는 거요?” 그러고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흘렸다. 어떤 때는 제법 그럴듯한 가짜를 내놓기도 했다. 그가 다녀간 며칠 후 그 물건이 다른 고서점에 나도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호산방에 물건을 팔러 오기보다는 물건을 구하러 오곤 했다. 그가 구하려는 물건은 옛 종이였다. 가짜 그림과 가짜 글씨를 만드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최따로도 가끔은 진짜 고서와 고문서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섭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따로가 고문서 한 뭉치를 내놓았다. 필사본과 시문·간찰 등이 마구 섞여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글씨의 됨됨이가 빼어나,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 생각되었다. 최따로에게 물건을 구입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문의 주인공들은 조선 후기의 시인 홍세태(洪世泰)와 최승태(崔承太)·정내교(鄭來僑) 등으로, 소위 위항시인(委巷詩人)들이다. 이 시문들은 모두 이들의 친필이었다. 그 중 홍세태는 17세기말 18세기초의 문단에서 중인층뿐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망있는 시인이었다. 이때 ‘선명(善鳴)’이란 제호의 필사본도 함께 입수했는데, 이 책은 홍세태의 시문을 모아 놓은 필사본으로 그의 친필본이었다.(*사진 28) 주인이 먼저 묻지도 않은 가격을 말한다. 그런데 그 가격이란 것이 가짜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비쌌다. 그래야 팔리나 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물건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그림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6절지보다 작은 크기에 새 한 마리가 수묵으로 그려져 있었다. 어느 가난한 선비의 벽장 문에 붙어 있던 그림인지 땟물도 그만이다. 첫눈에 격이 있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표암(豹菴)’이란 기명(記名)과 ‘광지(光之)’라는 낙관이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났다. 각(刻)도 훌륭했다. 표암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호로, 광지는 그의 자(字)이다. 한성부판윤과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서화로 북경에까지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이건 얼마요?” "지금 막 시골에서 사 온 건데 이만 원만 주시오.” 이처럼 가짜를 취급하는 가게에도 가끔은 귀물(貴物)이 섞여 있다. 그러나 이를 감별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모르고 사는 물건 중에도 가끔은 귀물이 섞여 있을 수 있겠지만, 이를 바라고 고서를 수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일부 수집가들은 잘 모르면서도 주저 없이 사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지 말아야 할 물건만 골라 사고, 정작 사야 할 물건은 놓치곤 한다. 고서를 잘 모르면서 고서를 사겠다는 마음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고서는 열 번 잘 사는 것보다 한 번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홉번째, 구입처와 구입 가격을 말하지 않는다. 고서 수집가끼리는, 어떤 책을 어디서 얼마를 주고 샀다는 등 자랑도 할 겸 정보를 교환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서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정보교환이 고서 수집에 그다지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런 정보들이 왜곡되어 수집가나 고서점 주인 모두에게 불편한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수집가 중에는 단골 서점의 책값이 너무 비싸다고 비방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비싸면 사지 않을 일이지 기껏 사 놓고 비싸다고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반대로 어느 고서점 주인은 손님에게 고서를 팔아 놓고는 아무개는 책값을 깎는다고 흉을 보기도 한다. 이 역시 깎으려 하면 팔지 않으면 될 일이지, 기껏 물건을 팔아 놓고 손님을 흉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화근은 말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고서 수집에서도 입이 무거워 나쁠 것은 없다. 대부분의 이름난 수집가나 고서점 주인들이 그러했다. 그래야 좋은 책을 수집하게 되는 법이다. 열번째, 이 서점 저 서점 다니지 않는다. 수집가 중에는 여기저기 순례하듯 다니는 사람이 있다.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서점 저 서점 다니다 보면 많은 책을 구경하게 되고 또 많은 정보를 얻게 마련이다. 이러한 고서점 순례는 고서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집 목적을 세웠다면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서의 유통구조는 깔때기와 흡사해서 좋은 책은 한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고서 수집의 성공 여부는 파트너 선택에 달려 있다. 다만 파트너의 자질에 관한 평가는 순전히 수집가의 몫이다. 파트너의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선 고서를 보는 그의 안목이다. 다음으로 인간관계가 고려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파트너십은 고서 수집에만 그치지 않고, 장서의 활용이라든가 혹 나중에 있을지 모를 장서의 처분 때에도 원만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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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이 추천하는 휴일의 시 9 : 첫눈 (이정하)첫 눈 이정하(李禎夏/1962~)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서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색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 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추천인: 편집부 ‘첫비’는 없다. ‘첫눈’만 있다. 첫눈은 첫 약속이다. 첫 약속은 순결하다. 첫 약속을 상기하는 것, 첫 약속을 떠올리는 것, 일상의 관성을 중단 시키는 것. 첫눈은 첫 약속을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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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8‘운생’과 ‘척하생’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다루는 과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자료 중에는 책뿐만 아니라 문서나 메모 등도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원래 보관되어 있던 상태를 결코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특히 문서나 간찰(簡札)의 경우, 봉투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봉투와 분리해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또 차례를 뒤섞어서도 안 된다. 차례가 뒤섞여 버리면 나중에 그 순서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간찰의 경우, 글쓴이가 ‘부(父)’ 또는 ‘자(子)’ ‘제(弟)’로 표시된 것이 많은데, 이런 간찰이 달랑 혼자 떨어져 있다면 글쓴이가 누군지를 밝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간찰이나 문서는 한 집안에서 보관되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다른 간찰이나 족보가 함께 있다면 그 아비〔父〕가 누구고 아우〔弟〕가 누군지를 간단하게 밝힐 수 있다. 또 책갈피에 메모지나 문서 같은 것이 끼어 있기도 한데, 이것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두는 것이 자료를 고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판 18) 1985년 조성호란 노인이 고문서 한 다발을 가지고 왔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는 고서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고서 중개인이었다. 성품이 바른 데다 고서화를 보는 감식안이 매우 높아 나는 노인과 가까이 지냈다. 그날 노인이 내놓은 자료는 첫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간찰과 시문들이었다. 글씨며 종이 됨됨이까지도 아주 빼어났다. 특히 『다산문답(茶山問答)』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서첩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또렷하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고운 비단에 당먹으로 쓴 글씨는 지금까지 접해 본 글씨 중에서 최고 명품의 하나로 꼽는 작품이다. 이 서첩은 다산 선생의 강진 유배 시절, 그곳까지 찾아온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1839)에게 써 준 서첩으로 문산과의 문답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당시 문산은 영광군수로 있는 아들 종영(鍾英)에게 와 있던 중이었다. 문산은 다산보다 열 살 아래였지만 이들은 학문적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돈독한 우의를 다진 것 같다. 지금은 다산과 문산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많아졌지만 내가 이 자료들을 접할 때만 해도 문산과 그의 아들 종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조 노인이 가져온 고서 중에는 『다산문답』 이외에도 다산의 장남 학연(學淵)의 간찰 여러 점이 함께 있었다.(*도판 19) 학연의 간찰 중에는 이름 대신 ‘척하생(戚下生)’이라고 표기한 것도 있었다. ‘척하(戚下)’란 성(姓)이 다른 겨레붙이를 상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이처럼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간찰을 학연의 것으로 단정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자료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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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뉴욕 할렘 설 대축제 Key to the universe(우주를 여는 열쇠)2.192월 19일 2015 뉴욕 할렘 설 대축제 Poet’s Den Gallery & Theater에서 열려 이희성 만다라 전시‘우주를 여는열쇠’ & 한충은의 퓨전 콘서트 “SEOL” 2015년 설날 뉴욕 포잇츠 덴 갤러리와 극장에서는 만다라 작가 이희성의 작품전 ‘Key To The Universe(우주를 여는 열쇠)와  2013년 KBS 국악대상 연주관악상 수상자인 대금, 소금 연주자 한충은의 퓨전 콘서트 ‘설’로 을미년 새해를 맞이하는 화려한 축제를 연다.   이스트할렘과 코리안플룻 닷컴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설 축제는 음력 설을 차이니즈 뉴이어만 알고 있는 뉴욕커들에게 우리 고유의 설 문화를 알리고 요즘 주요 레스토랑, 의류브랜드들의 플래그십 스토어들이 다투어 입점하면서 제 2의 르네상스를 맞고있는 할렘 커뮤니티에 우리의 음악을 두루 알려 1930년대에 재즈와 스윙이 할렘에서 세계로 전파되었듯이 우리의 음악과 예술이 자연스럽게 대중화 되고 전파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30여 년간 요가와 명상을 해온 이희성 작가의 구도 과정을 그린 만다라전은 정신계와 물질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생과 사를 뜻을 품고 있는 산스크리트 어 ‘옴’의 다양한 배열과 색채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현실과 꿈, 자아와 집단 의식의 대비되는 양면성을 표현하고 그 안에서 우주의 질서를 찿고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기를 원하는 기도와 염원을 담았다. 오랜 명상을 통해 얻은 가르침을 수필과 명상시로 엮은 를 펴내기도 했던 이희성 작가는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 무병장수와 부귀영화의 의미를 가진 거북이 등에 만다라를 그린 ‘거북이 시리즈’를 최초로 공개할 예정이다. 한국의 대통령취임식, 소치 동계 올림픽 폐막식,  부산 국제 영화제,  G-20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다양한 연주를 통해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과 한국 악기의 가능성을 널리 알린 대금, 소금 연주자 한충은은  정악, 민속음악, 현대의 창작 국악 뿐 아니라 이정, 박정현,임재범, 전인권, 이은미 등의 수 많은 음악인들과 교류하여 대중음악, 한류 드라마 OST 녹음 작업들을 해왔으며 바비맥퍼린, 리얼그룹, 잉거마리, 스테판 칼슨, 밥제임스등의 거장들과 함께 새로운 음악의 시도를 보여왔다 최근 국악소녀 송소희의 중독성 있는 KT 광고 음악을 작곡하여 “아니라오, 아니라오”의  패러디의 열풍까지 일으키며 한국 음악계의 다빈치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국악인으로 한정 짓기에는 어떤 쟝르의 음악도 포용할 수 있는 넓고 깊은 연주와 음악적 이해의 폭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미 작년 여름 포잇츠 덴 극장에서 할렘 커뮤니티의 주요 경제계, 정계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바 있으며 그가 불러일으킨 한국 음악, 문화에 대한 관심과 포용이 이번 할렘 설 축제를 기획하게 된 계기를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할렘 설 페스티벌 콘서트는 한국의 슈퍼세션이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연주자들 – ‘나는 가수다’ 연주팀의 숨은 공신이자 TVN Saturday Night Live 하우스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퍼커셔니스트 조재범, 한국의 전설적인 퓨전 밴드 웨이브 출신으로 재즈 보컬 나윤선, 김건모, BMK, 김연우등 한국 최고의 대중음악인들과의 녹음 및 라이브 활동을 하고 있는 실력파 기타리스트 한현창,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은상수상으로 데뷰해 박정현, 이수영등의 콘서트 세션과 뮤지컬 배우, 보컬로도 활동하고 있는 다재 다능한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김정환 – 등이 한충은과 함께 우리의 선율, 재즈와 락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신명나는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할렘 설 축제는 2월 19일 맨하탄 309 East 108 Street에 위치한 포잇츠 덴 갤러리와 극장에서 6pm 이희성 전시회 “우주를 여는 열쇠” 오픈 리셉션, 8pm 한충은 콘서트로 열리게 된다.  전시회는 2월 19일부터 25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희성 “ Key to the universe(우주를 여는 열쇠)” 만다라 전 2월 19일 부터 25일까지 칵테일 리셉션 2월 19일 6pm  Free 한충은퓨전 콘서트 “SEOL”  2월 19일 8pm   티켓 $20 예매: www.eastharlempresents.org          Phone: 212.427.1445 / 718.764.7559        [이희성 작가 ] “나의 작품은 나의 기도이자 영혼의 염원입니다. 내 작품에 깃든 문양과 색상의 파장으로 우주의 질서를 부르고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기를 추구합니다. 옴을 통해 우주의 신성한 에너지를 끌어내 태고적 아늑한 본질의 세계로 되돌아 가기를 추구합니다.” 1980년대 요가 밀교 의식 중 무아지경에서 “아이엠 옴(ॐ)”하고 외친것이스크리트어 ‘옴’에 대한 이희성의 열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옴’을 통해 우주와 진리의 실체를 추구하면서 본능적으로 그림으로 승화하게 되었다.   “매일 새벽 한 두시에 일어나 세상이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 작업을 합니다.  이 시간에 작품세계에 몰입하고 있으면 온 우주의 명멸하는 기운을 감지하게 되고 삼라만상의 기운들이 숭고하고 맑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반 수면 상태에서 우주의 힘의 원천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끌어  한 획 한 획마다 싣지요.  때로는 이 과정이 너무도 내 육신에 벅차 쓰러질 뻔 하기도 했지만 멈출 수가 없어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어김없이 일어나 다시 작업을 계속 하지요.” 인도의 평론가이자 저명한 시인 케셰이 말리크는 이희성의 작품 속에 ‘소우주와 대우주가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고 극찬했다.  ‘옴’을 매일 보고 읊으면 진리와 화합을 추구 하게 한다고 굳게 믿는 인도인들에게 2004년 이희성은 100여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인도에는 옴이 일상 생활에 깊숙히 접목되어 있지요.  인도의 원로 학자들은 처음엔 내 작품을 보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경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고 환희 하는가 하면 영혼의 어떤 결정체를 나타낸 예언자로 대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힌두 경전을 다시 써야 한다는 과분한 찬사도 들었습니다.” 이희성의 ‘옴’은 산스크리트 심볼이기 전에 정신계와 물질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현실과 꿈, 자아와 집단 의식의 양면성 속에 생멸하는 작가 자신 또는 영혼을 ‘옴’ 심볼 및 문양, 순열, 색채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희성의 ‘옴’은 물질 주의가 만연한 현대 생활 속에서 본연의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연과 우주 속의 ‘나’를 되돌아 보게 한다.   한국 닥지나 네팔산 수제 종이에 천연 안료를 손수 기름에 섞어 표현하는 그의 작품은 첫눈에 옛 고찰의 처마를 단장하였던 단청이나 티벳의 샌드 만다라와 같이 섬세하고 아름다우나 또한 그 밑에서 한국 서예의 기법이 거칠면서도 남성적인 에너지로 스며난다.   이희성의 정신세계는 그녀가 1988년과 1996 년 사이에서 쓴 수필 및 명상시를 출간한 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씨는2003년 5월에 간행된 작가이기도 하다.   이희성이 쓴 다음 글은 그의 작품세계를 잘 반영한다 :       [옴 만다라 작품 구도 중에] / 2003. 11. 5 수 백 수 천자의 옴 색색 종이에 담을 때면 내 마음의 색상 또한 화려하고 그윽하다. 황금 가루 진주 가루 빨강색 돌 가루가 수놓아 지는 문양과 마음의 정도와 깊이에 따라 대천 세계의 모든 에너지의 기운들이 생성되어 지고 맑은 영혼들은 그 기운에 따라 편안히 자신의 인도되어 지는 길을 순수히 따라가는 모습도 보게 되고 감지됨을 느낀다.몇 시간씩 옴 만다라 속에 묻히게 되며는 온 몸 속에 따뜻한 열기와 마음의 지복감을 느끼고 맑고 투명하여 내가 옴인지 옴이 나로 변하는가 신통 묘용의 기운 속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삼라 만상 속에 필요한 에너지 파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충만감 속에서 세상을 향한 사랑과 행복감 속에 깊이 빠져든다. 뭍 시름을 떨구어 버린 채 온 우주 법계 속 한 점의 에너지로 수천 수백만의 에너지로 맑게 유영하고 있는 내 직심만이 존재함을 느낀다. 이 세상 모든 것 한 에너지로 모여올때 갈구하던 생의 본질을 알아챈 안도의 기분 너그러움과 용서와 자비의 마음이 삶의 가장 필요한 생명체임을 알게 된다.     [대금, 소금 연주자 한충은] * 현) KBS 국악관현악단 부수석 * 현)국악팝스오케스트라 "여민" 악장 * 현)청소년국악관현악단 지도교수 * 아시아전통오케스트라 악장 * 한국문화예술진흥교육원(ARTE) 명예교사 * 미국 작곡가협회(ASCAP, 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 & Publishers) 멤버 * 2013년 KBS국악대상 관악상 수상 * 2014년 제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최우수상 2006 음반 “ MORNING ” 출반 , 2012 음반 “ 숲 - Forest" 출반 2004 ~  한충은개인콘서트 "笒聲新話(금성신화)" l, ll, lll, Ⅳ,Ⅴ, Ⅵ, Ⅶ 2013 ~ 한충은 Concert in NowYork Sound of Bamboo Flute “The Starlight Conc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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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부인> 경기소리극 10.301,800여 년 전 열부 경기소리극으로 환생 경기소리극 1. 일시 : 2014년 10월 30일(목) 오후 7시 30분 2. 장소 :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3. 주최 : 강동예술인연합회 4. 티켓 : 전석 무료 5. 문의 : (02)471-5179 6. 공연소개 백제 개루왕(蓋婁王) 때 전해오는 설화 속의 열녀 도미부인이 1.800년의 세월을 넘어 이 시대에 환생한다. 강동예술인연합회 주최, 강동예총 국악협회 주관, 강동구청・국악방송 후원으로 10월 30일(목) 저녁 7시 30분 강동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리는 경기소리극 제3회 기획공연을 통해서다. 도미부인은 백제 개루왕 때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로, 한성 백제의 터전인 강동구의 대표적인 설화다. 부부 사이의 애틋한 정(情)과 신의(信義)가 담긴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늘에 되살려 경기소리극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지난 2008년부터 경기소리극 을 직접 제작하고 공연해온 강동예총 국악협회 박매자 회장(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은 “한성 백제의 터전이 바로 강동구라는 점을 고려해 고장을 대표하는 도미부인의 순결과 정절을 예술을 통해 기림으로써 자라나는 청소년들한테 교육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공연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박 회장은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도미부인을 경기소리극으로 만들어 최초 공연함으로써 경기소리의 영역을 넓혔다는 평을 얻은 바 있다. 도미부인의 본래 이름은 아랑으로 당대 최고 미인이었다. 아랑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미인이라서 귀족들에게 많은 구애를 받았지만, 그녀는 도미라는 남자만을 사랑했다. 하지만 신분의 차별이 심했던 당시 그들의 사랑은 허락을 받을 수 없었고, 둘은 결국 멀리 도망가 결혼을 한다. 그 후 백제의 개루왕이 도미부인을 보고 첫눈에 반해 후궁으로 삼으려 하지만 부인은 도망가고 남편이 대신 잡혀 끔찍한 일을 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재회에 성공한 부부는 고구려로 망명해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 강동구 관계자는 “지역의 소중한 설화를 단순히 설화로 묵혀둘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새롭게 재조명함으로써 강동의 상징으로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도록 해야 한다”며 “도미부인은 1,800년을 넘어 이 시대 강동구민에게 한발 더 가깝게 다가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경기소리극 공연은 벌써 팬들의 기대가 크다. 강동예총 국악협회 측은 “경기소리극 을 통해 관객들이 1,800년 전 남편을 사랑하고 순결을 지켰던 한 여성의 고귀한 정신을 되새겨 현실을 살아가는 등불로 삼았으면 좋겠다”며 희망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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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립국악단의 국악뮤지컬 <가인춘향> 6.22 - 10.191. 일시 : 2013년 6월 22일(토) ~ 10월 19일(토) /매주토요일 오후 8시 *7월 26일(금) ~ 8월 24일(토) 1개월간 매주 금,토 오후 8시 2. 장소 : 광한루원 수중무대 3. 주최 :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 4. 주관 : 남원시 5. 티켓 : 전좌석 무료 6. 문의 : 063)620-6167,6767 7. 공연소개 올 여름 더위를 피해 남원으로 떠나보시는건 어떨까요? 남원시립국악단은 오는 6월 22일부터 10월 19일까지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남원 광한루원 수중무대에서 국악 뮤지컬 ‘가인춘향'을 무료로 공연할 예정입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관광객이 몰리는 7월 19일부터 한 달간은 금요일에도 공연합니다. 국악 뮤지컬 ‘가인 춘향’은 젊은 층의 선호도가 높은 뮤지컬의 빠른 전개와 활기찬 율동, 구체적인 서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극적 완성도를 높였는데요. 이번 공연은 특히 이몽룡이 성춘향을 보고 첫눈에 반한 곳으로 알려진 광한루원에서 펼쳐져 극의 감동을 더할 것으로 보입니다. 올 여름, 남원 지리산 계곡에서 더위도 피하시고, 국악 뮤지컬 '가인춘향', 신관사또부임행차 등 무료 상설 공연과 둘레길, 광한루원, 혼불 문학관 등 풍부한 관광 자원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국악 뮤지컬 [ 佳人 춘향 ] ■ 제 작 진 : 예술감독 (이난초) / 대본·연출 (오진욱) / 음악감독 (김 선) / 안무 (강만보) ■ 출 연 진 : 춘향(조선하, 김윤선) / 몽룡 (임현빈, 이승민) / 월매 (이난초, 채원영) / 도창 (고현미) 향단(박계숙) / 방자(배건재,이태완) / 변사또(이태완,황의출) / 기타 (서연희, 이유정, 김은원, 설지애 ) ■ 연 주 단 : 지휘(김선), 가야금(김미량, 은현주)/ 거문고(김준엽) / 아쟁(김성혁, 김소영) / 해금(홍효정, 김수빈) 피리(김근수, 이진호)/ 대금(조현정, 조재경)/ 타악(이여송, 이양규, 김지영) /신디(김하진) ■ 무 용 부 : 강만보, 이지현, 박지은, 김미연, 장은실, 김새별, 강현심, 김나연 ■ 기 획 : 총기획(황의성) / 진행(황재두) / 홍보(이미애) ■ 행정지원 : 문화관광과장(장주호), 국악진흥담당(김년수), 국악진흥주무관(서실교) ■ 공연일시 : 6월 22일 ~ 10월 19일 (매주 토요일 오후 8시) 7월 19일 ~ 8월 16일 (매주 금요일. 토요일 오후 8시) ■ 공연장소 : 광한루원 수중무대 * 우천 시에도 공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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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과 북녘소리 11 월 21 일일 시 : 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장 소 : 민속극장 풍류 문 의 : 공연전시팀 02)3011-2178~9 공연소개 옛날 서울 장안에 삼정승이 살았는데 세집에 모두 아이가 없어 명산대찰 찾아가 불공을 드려 세집에서 딸 하나씩을 낳아 이름은 태몽꿈을 따라서 세월네 네월네 배뱅이라 지었습니다. 어느덧 혼기가 되어 앞집 세월네와 네월네는 시집을 갔으나 배뱅이는 시집을 못가고 있다가 뒤늦게 시집을 가려고 여장혼수 많이 받아 놓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금강산에 어여쁘게 생긴 상좌중이 시주를 나와서 마침 배뱅이네 집 앞에서 염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상좌중이 배뱅이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 염불이고 시주고 다 팽개치고 도로 금강산의 사찰로 가서 상사병이 들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를 그 사찰 주지가 눈치를 채고 상좌중을 살려 내고자 싸리나무로 체독을 만들어 체독 속에 병든 상좌중을 집어넣고 배뱅이집을 찾아가서 부모에게 밀가루라 속이고 배뱅이 방에 상좌중이 든 체독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 남녀는 마침내 부모님의 눈을 속이고 사랑을 나누다가 불현듯 상좌중이 떠나자 배뱅이가 상사병으로 죽게됩니다. 배뱅이가 죽자 배뱅이 부모가 각 도 무당 불러 굿을 하는데 평양사는 건달이 배뱅이 사는 동네 주막집에서 탁주집 할머니께 배뱅이 죽은 내력을 모두 듣고 엉터리굿을 하여 돈을 벌어서 떠나가는 내용이다. 공연순서 1. 영변가 2. 연평도난봉가 3. 배뱅이굿(중) 상여나가는대목 ~ 엉터리굿하는대목 4. 난봉가 연곡 5. 살풀이춤 6. 투전풀이 7. 배치기.자진뱃노래 출연자 박준영(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 전수조교) 유지숙(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특별출연 최병문, 유상호, 이미리, 김유리, 조단비, 이주윤, 이수현, 정윤희, 김재민, 이유진, 정다은, 황준영, 이지연 한유정, 전지현, 박성수, 이다경 ,박현주 ,김낙기 외 악사및 배치기사물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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